나의 살던 고향은.. '춘양'이라는 곳이다.
'봄春 볕陽'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봄볕이 그리운.. 그만큼 추운 곳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흔히들 이 곳 춘양을 '한국의 시베리아'라고 하는 표현을 쓰곤한다.
나는 이곳 춘양에서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다.
나의 집에서 춘양중학교까지는 5km정도 거리였는데
나는 마을 친구 몇명과 매일 걸어서 이 중학교를 다녔었다.
중학교를 가는 길목에
터가 넓은 기와집인 만산고택과 권진사댁이 있어 쉬었다 가곤 했다.
넓고 아름다운 이 고택들이 얼마나 부러웠던지...
나와 같은 중학교를 다녔던 아내와 함께 이 추억이 있는 고택들을 찾았다.
이 곳 만산고택은 조선 말기 문신이었던 만산 강용이 1874년 세운 전통 가옥이다.
여느 민간 가옥에서 사용할 수 없었던 춘양목으로 만들어 졌다.
춘양목은 이곳에서 생산되는 소나무인데
다른 소나무와는 달리 곧게 쭉 뻗고 재질이 좋아 궁궐을 짓는데 쓰일 만큼 우수한 나무로서
권력가나 큰부자들이 주로 이 나무를 사용하였고 일반서민들은 사용할 수 없는 목재였다.
100년이 넘는 세월을 견뎌온 가옥은
뒤틀림 하나 없어 금강송 춘양목의 가치를 제대로 느끼게 한다.
긴 행랑과 솟아오른 대문채를 지나 만나게 되는 화초 가득한 고택의 마당을 중심으로
검은빛 사랑채와 안채, 서재와 별채가 자리한다.
사랑채 오른편 작은 온돌방과 마루로 구성된 건물은 서실이다.
정면에 보이는 현판은 학문 정진의 뜻을 기리는 영친왕의 글씨다.
문화유산의 보존을 위해 진품 글씨는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사랑채 뒤편으로 숨어 있듯 자리하는 안채는 ‘ㅁ’자형 구조로
사랑채와 연결되는 툇마루까지 정성스럽게 만들어져 아름답다.
사랑채 왼편으로 별도의 낮은 담장을 두른 건물은 칠류헌이라 불리는 별채로
근대 최고의 서예가이자 우리나라 최초 사진관을 운영했던 해강 김규진이 쓴
현판이 원본으로 걸려 있다.
안채와 사랑채가 주인의 생활공간으로 쓰이는 것과 달리 독립적인 공간인 별채는
일반인들을 위한 고가체험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인근에 자리하는 성암 권철연의 고택인 권진사댁도 함께 둘러보았다.
권진사댁은 조선시대의 학자 성암 권철연(1874~1951)이 살던 집으로,
건너마을 운곡에 살던 부친이 1880년경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지금의 위치에 옮겨 지었다고 한다.
권철연은 1880년(고종 25)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을 지낸 인물이다.
춘양의 이름있는 산 만석봉을 뒤로 한 동향집으로,
9칸 一자집의 행랑채 중앙에 있는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사랑마당이 있고,
왼편에 3칸의 서당이 배치되었다.
행랑채 맞은편 정면 7칸, 측면 8칸으로 구성된 팔작지붕 ㅁ자집의 안채가 동쪽에 자리잡았다.
안채 양옆에는 좌우로 흙담을 만들어 안마당과 바깥마당을 구분하였다.
1991년 안채의 견치석 기단을 철거하고 자연석으로 다시 쌓았으며,
부식된 목부재와 파손된 기와를 교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등하교길 추억이 깃든 두 고택을 둘러 보면서
중학생때의 그 풋풋한 감성을 되돌아 볼 수 있어 좋았다.
아~ 옛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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